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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신채호 조선상고사] 광개토대왕의 왜구 격퇴

200p-201p

3. 광개토대왕의 왜구 격퇴

왜(倭)는 일본의 본 이름이다. 지금 일본이 왜와 일본을 구분하여 왜는 북해도(北海道) 아이누족이요. 일본은 대화족(大和族)이라고 하지만 일본 음에 화(和)와 왜(倭)가 같으니, 일본이 곧 왜임이 분명하다. 저들이 근세에 와서 조선사나 중국사에 쓰인 ‘왜’가 너무 문화 없는 흉포한 야만족임을 부끄럽게 여겨 드디어 화(和)란 명사를 지어낸 것이다.

백제 건국 이후까지도 왜가 어리석고 무지하여, 저 본삼도(本三島:일본 국토를 이룬 세 섬, 곧 본주(本主)・사국(四國)・구주(九州))에서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생활을 할 뿐이고 아무런 문화가 없었는데, 백제 고이왕이 그들을 가르쳐 인도해서 봉직(縫織)과 농작(農作)과 그 밖의 백공(百工)의 기예를 가르치고, 박사 왕인(王仁))을 보내 <논어>와 <천자문>을 가르쳐 주고, 백제 가명(假名) 곧 백제 이두자로 일본 가나(假名)란 것을 지어 주었으니 이것이 지금 이른바 일본자(日本字)라는 것이다. 왜 가 이처럼 백제의 교화를 받아 백제 속국이 되었으나, 천성이 침략하기를 좋아하여 도리어 백제를 침범하니, 진사왕 말년에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에게 석현(石峴) 등 10여개 성을 빼앗김을 통분히 여겨 기원 391년(광개토왕 원년) 왕이 진무(眞武)로 하여금 고구려가 새로 점령한 땅을 공격하고, 한편으로 왜와 친교하여 함께 고구려에 대한 동맹을 맺었다. 기원 395년(광개토왕5년) 광개토왕이 과려 원정에서 돌아와 수군으로 백제 바닷가와 강가의 일팔성(壹八成)・구모로성(臼模盧城)・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관미성(關彌城) 등을 함락하고, 육군으로 미추성(彌鄒城)・야리성(也利城)・소가성(掃加城)・대산한성(大山韓城) 등을 함락하고 왕이 몸소 갑옷과 투구를 두르고 아리수(阿利水), 곧 지금의 월당강(月唐江)을 건너 백제 군사 8천여명을 죽였다.

그러자 백제 아신왕(阿莘王)이 다급하여 왕제 한 사람과 대신 10사람을 불모로 올리고, 남녀 1천명, 세포(細布) 1천 필을 바쳤으며, ‘노객(奴客)’의 맹서를 쓰고, 고구려를 피해 사산(蛇山: 지금의 직산(稷山))으로 천도하여 ‘신위례성(新慰禮城)’이라 일컬었다. 그 뒤 고구려가 북쪽 선비와 싸울 때마다 백제는 그 맹약을 어기고 왜병(倭兵)을 불러, 고구려가 새로 점령한 땅을 침노하고, 또 신라가 고구려와 한편 됨을 미워하여 왜병으로 신라를 침노했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용병이 신과 같이 신속하여 북으로 선비를 치는 틈에 늘 백제의 기선을 제어하고 왜를 격파해서 신라를 구원했다. 임나가라(任那加羅:지금의 고령(高靈))에서 왜병을 대파하여 신라 내물왕이 몸소 광개토왕을 찾아보고 사례함에 이르렀다. 기원 407년 지금 대동강 수전(水戰)에서 가장 기묘한 공을 세워 왜병 수만 명을 전멸시키고 갑옷 투구 1만 여벌과 수없이 많은 무기와 물자를 얻으니, 왜 가 이로부터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다시는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여 남쪽이 오랜 동안 평온했다.

발췌: 신채호 조선상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