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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신채호 조선상고사] 백제 왕손 서동(薯童)과 신라 공주 선화(善花)의 결혼

제3장 동서전쟁

1. 백제 왕손 서동(薯童)과 신라 공주 선화(善花)의 결혼

244-247페이지

기원 6세기 후반 백제 위덕왕(威德王) 중손 서동(薯童)은 준수한 도련님으로 삼국 안에서 크게 이름이 났었고, 신라 진평왕(眞平王) 둘째 따님은 삼국 안에서 가장 어여쁜 아가씨로 이름이 났다. 그런데 진평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몇을 낳은 가운데 둘째 따님 선화가 꽃같이 어여쁘므로 가장 사랑하여 “신라 왕 된 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선화 아버지 된 것이 나의 자랑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왕은 늘 선화를 위해 사윗감을 구했는데, 서동 이름을 듣고는 선화 남편으로 희망하였고, 위덕왕은 증손 서동을 위해 증손부감을 구했는데, 또한 선화 이름을 듣고 서동 아내로 희망했다.

가족 제도 시대라, 한 가정 어른, 곧 양편 주혼자(主婚者)로서, 게다가 저마다 한 나라 대왕으로서 이렇게 생각했다면 그 결혼은 물론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절대로 성립되지 않을 사정이 있었다. 설혹 누가 그 결혼을 제의하더라도 진평왕이나 위덕왕은 반드시 크게 노하여 그 제의한 자를 역적놈이라고 처벌할 만한 사정이 있었다.

SBS 드라마 선화공주 이보영

 

신라는 여러 대에 걸쳐 박(朴)・석(昔)・김(金) 세 성이 서로 결혼하여, 그 아들이나 사위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왕위를 잇게 해 왔다. 따라서 성이 다른 집안 딸은 혹 세 성의 집으로 데려올수 있으나, 세 성 집안 딸은 성이 다른 집안에게로 시집가지 못하는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소지왕(炤智王)이 백제 동성왕((東城王)에게 딸을 주었다고 하고, 법흥왕(法興王)이 밈라가라 가실왕(嘉悉王)에게 누이동생을 주었다고 한 것은 실은 친딸, 친누이 동생이 아니라, 육부(六部) 귀골(貴骨)의 딸이나 누이동생을 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김씨 인 진평 딸 선화의 장래 남편은 박씨가 아니면 석씨, 석씨가 아니면 그 동성 김씨라야 했다. 그러니, 어찌 신라 사람도 아닌 백제 부여씨(扶餘氏) 서동 아내가 될 수 있으랴? 이는 선화 쪽 사정이다.

백제는 신라처럼 결혼에 관하여 성씨에 엄격한 제한은 없었다. 그러나 위덕왕 아버지 성왕(聖王)을 죽인자가 누구인가? 곧 진평왕 아버지인 진흥왕(眞興王)이요, 진흥왕은 성왕 사위였다. 증손부 며느리를 어디서 대려오지 못하여 아버지 죽인 원수 손녀를 데려오랴? 장인을 죽인 괴팍하고 흉악한 사위의 손녀를 데려오랴? 서동의 장래 아내가 백제 목씨(木氏)・국씨(國氏) 등 8대 성 여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민가 여자는 될지언정 어찌 전대 원수인 진흥왕 자손이 될 수 있으랴, 이는 서동 쪽 사정이다.

또 백제나 신라의 여러 신하 들은 거의 가 전쟁에서 서로 죽이던 이들의 자손이므로 모두 그 결혼을 반대할 것이다. 이것도 두 사람이 결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정이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서동은 커 갈수록‘백제 왕가에 태어나지 않고 신라 민가 자제로나 태어났더라면 선화 얼굴이라도 한번 바라볼 수 있을 것을, 선화에게 내 모습을 한번 보여줄 수 있을 것을’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침내 서동은 백제 왕궁에서 탈출하여 신라 동경(東京:지금의 경주)을 찾아가서는 머리를 깎고 어느 대사(大師) 제자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불교를 존중하여 왕이나 왕의 가족들은 궁중에 중을 청하여 재도 올리고, 고승 1백명을 모시고 설법을 듣는 큰 법회를 베풀기도 했다. 서동은 법회를 틈타 오래 그리던 선화와 만날 길을 얻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선화는‘백제 서동이 사랑스러운 사나이라고는 하지만 아마 저 중만은 못할 것이다’하고, 그 날부터 서동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중 하나를 그리게 되었다. 한편 서동은 또한‘내가 네 남편이 되지 못할진대 죽어 버리리라, 너도 내 아내가 되지 않으려거든 죽어 버리라’하는 마음을 가졌다. 두 사람 마음은 이렇게 서로 맺혔다.

그래서 서동은 선화 시녀에게 뇌물을 주고 밤을 타 선화 궁으로 들어가 사통을 했다. 선화는 이제 서동이 아니고는 다른 사나이 아내가 되지 않으리라 하고, 서동도 선화가 아니고는 다른 여자 남편이 되지 않으리라고 굳게 맹세를 했다. 그러나 주위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 대야 어찌하랴?

SBS 드라마 선화공주와 서동요

 

서동과 선화는 의논한 끝에 차라리 이 일을 세상에 널리 알려, 세상에서 허락하면 결혼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함께 죽기로 작정했다. 서동은 가끔 엿이며 밤이며 그 밖의 여러 가지 과일을 많이 사가지고 거리로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꾀어 이런 노래를 부르게 했다.

‘선화 아가씨는 염통이 반쪽이라네, 본래는 온통 이었지만, 반쪽은 떼어서 서동에게 주고 반쪽은 남겨서 가지고 있으나 상사병을 앓고 있다네, 서동이여, 어서 오소서, 어서 와서 염통을 도로 주시어 선화 아가씨를 살리소서.“

그 노래는 하루아침에 신라 서울 동경에 쫙 퍼져서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선화는 그 아버지 진평왕에게 고백하고, 서동은 귀국하여 증조부 위덕왕에게 바른대로 고하여,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 하면 죽기로 반대했다. 진평왕과 위덕왕은 처음에는 부모나 조부모 몰래 남녀가 사통한 것은 가정의 큰 변이라 하여 당장 사형에 처할듯했으나. 사랑하는 딸, 사랑하는 손자를 어찌하랴?

진평왕은 마침내 박・석・김 세 성의 결혼 습관을 깨뜨리고 위덕왕은 아버지 원수를 잊고, 서동과 선화의 결혼을 허락하여 두 나라 왕실이 다시 새 사돈 사이가 되었다.

SBS드라마 무왕과 선화공주

 

2. 결혼 뒤 10년 동안 두 나라 동맹

두 사람이 결혼한 뒤로 신라와 백제 두 나라는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삼국사기≫에는 그런 말이 없으니, 그것은 신라가 나중에 고타소랑(古陀炤娘)의 참혹한 죽음(다음절 참조)으로 백제를 몹시 원망하여, 백제를 토멸한 다음에 그런 기록을 모두 태워 버려서, 신라 왕가 여자로서 백제에 시집간 자취를 숨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서동이 선화 공주의 아름다움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도읍으로 가서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했다고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覺)≫에는‘무강왕(武康王)이 진평왕 딸 선화 공주에게 장가들어 용화산(龍華山)에 미륵사(彌勒寺)를 짓는데 진평왕이 여러 공인을 보내 도왔다’고 하였다.

또≪고려사≫<지리지>에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 기준(箕準) 비(妃)의 능을 세상 사람들이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부른다’고 하고, 그 주(註)에 ‘백제 무왕(武王) 어릴 적 이름 서동(薯童)이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서동이 백제 왕위를 물려받은 지 42년 만에 돌아가서 시호를 무왕(武王)이라 했으니, 무강왕은 후조선 기준(箕準)이 아니라, 무왕을 잘못 쓴 것이다. 또 서동과 말통(末通)은 이두로 읽으면, 서동의 서(薯)는 뜻을 취하고 동(童)은 음을 위하여 ‘마동’으로 읽을 것이요, 말통(末通) 두 글자가 다 음으로‘마동’으로 읽을 것이므로, 말통대왕릉은 곧 무왕 서동과 선화 공주를 합장(合葬)한 능이다.

그런데 말통대왕이 왕이 된 뒤에 곧 신라와 혈전을 벌이게 되었으니, 신라가 그 적국에 많은 공인을 보내어 절 짓는 일을 도왔을 리가 없다. 미륵사 건축은 대개 서동이 왕손(王孫)으로 있을 때 원당(願堂)으로 지은 것이고, 그 원당을 지을때 에는 신라・백제 두 사돈의 나라가 서로 화평하여 고구려에 대한 동맹국이 되었으므로, 진평왕 원년에서 24년까지, 곧 백제 위덕왕 26년부터 45년을 지나 혜왕(惠王) 2년과 법왕(法王) 2년을 거쳐 무왕 2년까지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 한 번도 전쟁이 없었다. 또 두 나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수(隋)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치기를 청함으로써 수의 문제・양제 두 대의 침입(제10편 참고)을 일으키게 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