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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신채호 조선상고사] 장수왕의 음모와 위병(魏兵)침입

2. 장수왕의 음모와 위병(魏兵) 침입

215-216

이때 중국은 황하(黃河) 남북으로 갈려 곧 위(魏)와 제(齊) 두 나라로 분립했다. 위는 곧 선비족 탁발씨(拓跋氏)로, 모용씨(慕容氏) 연(燕)을 대신하여 일어난 나라인데, 그 세력이 대단히 커져서 그즈음 유일한 강국으로 치게 되었다.

그런데 장수왕은 남쪽 네 나라 동맹으로 백제를 정복할 수 없으므로 손도 대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신랄한 수완을 부려 제3국이 먼저 백제를 격파하게 하고 자기는 그 뒤에서 이익을 거두려고 했다. 그래서 해마다 황금과 명주(明珠) 10되를 위왕에게 보내 주다가, 3년 만에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빈손으로 위왕에게 보냈다. 위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예실불이 “사비(泗沘)” 부여에는 황금산이 있고 섭라(涉羅:지금 제주(濟州))에는 명주담(明珠潭)이 있어 두가지 보물이 한량없이 나므로 예전에는 이를 캐어서 폐하께 바쳤는데, 이제 사비 부여는 백제 도읍이 되고 섭라도 백제가 정복하여 황금산과 명주담이 모두 그들 손에 들어가서, 우리 고구려인은 그 두 가지 보물을 구경할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폐하께 갖다 드릴것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위나라 임금과 신하들이 이 말을 곧이듣고 백제를 쳐서 황금산의 황금과 명주담의 명주를 빼앗을 야욕에 동침(東侵) 군사를 일으켰다.

≪삼국사기≫에는 ≪위서≫에서 뽑아다가 예실불의 일을 장수왕 아들 문자왕(文咨王) 때 일로 기록했으나 남양 예씨(南陽芮氏) 족보에 따르면, 예실불을 그 시조라 하고 그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간 일을 앞서 말한것과 같이 기록했다. 대게 위가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는 제(齊), 곧 그 육지가 맞닿아 있는 나라를 두어 두고 멀리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싸운다는 것은 해운이 불편한 고대에서 땅을 다투려는 자의 일이 아니라 예실불의 말에 속아 황금과 명주를 가지려 했음이 사실인 듯하고, 위의 백제 침입이 장수왕때요 문자왕 때가 아니니 ≪삼국사기≫ 연대가 틀린 듯하므로, 이제 ≪삼국사기≫를 버리고 예씨 족보를 따른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장수왕의 음모와 위병 침입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