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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신채호 조선상고사] 수두 홍포(弘布)와 문화 발달

수두 홍포(弘布)와 문화 발달


1. 부루(夫婁)의 서행(西行)

<고기(古記)>에 ‘단군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하우(夏禹)를 도산(塗山)에서 만났다’고 하였고, 또 <오월춘추(吳越春秋>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으니 ‘당요(唐堯) 때에 9년 동안 홍수가 져서 당요가 하우(夏禹)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라 하였다. 우(禹)가 8년 동안이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매우 걱정하여, 남악(南嶽)・형산(衡山)에 이르러 흰 말(白馬)을 잡아 하늘에 제사 드려 성공을 빌었는데, 꿈에 어떤 남자가 스스로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라 일컫고 우에게 “구산(九山) 동남쪽 도산(塗山)에 신서(神書)가 있으니, 석 달 동안 재계(齋戒)하고 그것을 꺼내 보라” 말하므로, 우가 그 말에 따라 금간옥첩(金簡玉牒) 신서를 얻어 오행통수(五行通水)의 이치를 알아 홍수를 다스려 성공하고, 이에 주신(州愼)의 덕을 잊지 못하여 정전(井田)을 제정하고 율도량형(律度量衡) 제도를 세웠다’고 하였다.

현이(玄夷)는 당시 조선의 동・남・서・북・중 오부를 남(藍)・적(赤)・백(白)・현(玄 : 黑)・황(黃)으로 별칭(別稱)했는데 북부가 곧 현부(玄部)이니 중국인이 현부를 가리켜 현이(玄夷)라고 한 것이요, 창수(蒼水)는 곧 창수(滄水)이고, 주신은 중국 춘추 시대 글에는 늘 조선을 주신・숙신(肅愼)・직신(稷愼) 또는 식신(息愼)으로 번역되었으니, 주신은 곧 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옛 기록의 부루(夫婁)는 <오월춘추>의 창수사자이니,

그때 중국에 큰 홍수가 있었음은 여러 가지 옛 역사가 다 같이 증명하는 것인데, 단군왕검이 그 수재를 구제해 주려고 아들 부루를 창해사자에 임명하여, 도산에 가서 하우를 보고, 삼신오제교(三神五帝敎)의 일부분인 오행설(五行說:水火 金士木)을 전하고 치수(治水)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우는 왕이 되자 부루의 덕을 생각하여 삼신오제 교의(敎義)를 믿고, 이를 중국에 전포(傳布)하였으며, 정전과 율도량형 또한 중국의 창작이 아니라 조선의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꿈에 창수사자를 만났다’고 하였는가? 신성(神聖)을 장식하여 사실을 신화(神話)로 만들고자 함이니, 이는 상고(上古)에 흔히 있는 일이다.

2. 기자 전래

하우가 홍수를 다스린 공으로 왕이 되어 국호를 하(夏)라 하고, ‘수두’의 교를 흉내 내어 도산(塗山)에서 받은 신서(神書)를 <홍범구주(洪範九疇)>라 일러 신봉하였다. 그 뒤 하가 수백년 만에 망하고 상(商)이 뒤를 이어 또한 수백년 만에 망하였다. 뒤를 이어 주(周)가 일어나서는 주무왕(周武王)이 <홍범구주>를 배척하므로, 은(殷) 왕족 기자(箕子)가 새로 <홍범구주>를 지어 무왕과 변론하고 조선으로 도망하니, 지금 상서(尙書)의 홍범(洪範)이 곧 그 것이다.

<홍범> 편(篇)에 ‘초일(初一)은 오행(五行)이요, 차이(次二)는 경용오사(敬用五事)요, 차삼(次三)은 농용팔정(農用八政)이요, 차사(次四)는 협용오기(協用五紀)요, 차오(次五)는 건용황극(建用皇極)이요, 차육(次六)은 예용삼덕(乂用三德)이요, 차칠(次七)은 명용계의(明用稽疑)요, 차팔(次八)은 염용서징(念用庶徵)이요, 차구(次九)는 향용오복(響用五福)・위용육극(威用六極)이다.

첫째 오행(五行)은 일은 수(水)・이는 화(火)・삼은 목(木)・사는 금(金)・오는 토(土)요, 둘째 오사(五事)는 일은 모(貌)・이는 언(言)・삼은 시(視)・사는 청(聽)・오는 사(思)요, 셋째 팔정(八政)은 일은 식(食)・이는 화(貨)・삼은 사(祀)・사는 사공(司空)・오는 사도(司徒)・육은 사구(司寇)・칠은 빈(賓)・팔은 사(師)요, 넷째 오기(五紀)는 일은 세(歲)・이는 월(月)・삼은 일(日)・사는 성신(星辰)・오는 역수(曆數)요,

다섯째 황극(皇極)은 황건기유극(皇建基有極), 여섯째 삼덕(三德)은 일은 정직(正直)・이는 강극(剛克)・삼은 유극(柔克)이요, 일곱째 계의(稽疑)는 택건립복서인(擇建立卜筮人)이요, 여덟째 서징(庶徵)은 우(雨)・양(暘)・오(燠)・한(寒)・풍(風)이요, 아홉째 오복(五福)은 일은 수(壽)・이는 부(富)・삼은 강녕(康寧)・사는 유호덕(攸好德)・오는 고종명(考終命)이요, 육극(六極)은 일은 흉극절(凶極折)・이는 질(疾)・삼은 우(憂)・사는 빈(貧)・오는 악(惡)・육은 약(弱)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문구는 도산(塗山) 신서(神書) 본문이고, 나머진 기자가 연술(演述)한 것이다. 천내석우 홍범구주(天乃錫禹 洪範九疇)는 곧 기자가 단군을 가리켜 하늘(天)이라 하고, 단군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을 하늘이 주었다고 함이다.

이는 ‘수두’교의(敎義)에 단군을 하늘의 대표로 보기 때문이고,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한 것은 상(商)이 주(周)에게 망하는 동시에 상의 국교인 ‘수두’교가 압박을 받으므로 고국을 버리고 수두교의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서(漢書)에 거북이 문자를 등에 지고 낙수에서 나왔으므로 우가 <홍범(洪範)>을 연술하였다 했지만, <역(易)> 계사(繫辭)에 ‘황하(黃河)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와, 성인이 이것을 본받았다(河出畵落出書聖人則之)’라 하여 분명히 하도(河圖)・낙서(洛書)가 다 역괘(易卦)를 지은 원인임을 기록하였는데,

이제 낙수 거북의 글로 인하여 홍범을 지었다고 함은 어찌 망령된 증명이 아니랴(위 일절은 청나라 유학자 모기령(毛奇齡)). <오월춘추>에 따라 홍범 오행이 조선에서 전해간 것으로 믿음이 옳고, 또 <초사(楚辭)>에 따라 동황태일(東皇太一) 곧 단군왕검을 제사하는 풍속이 호북(湖北)・절강(浙江) 등지에 많이 유행하였음을 보면, 대개 하우가 형산(衡山)에서는 하늘에 제사하고, 도산에서는 부루에게서 신서(神書)를 받은 곳이므로 가장 ‘수두교’가 유행한 지방이 된 것이다.

3. 흉노(匈奴)의 휴도(休屠)

‘수두교’가 중국 각지에 퍼졌음은 앞에서 말하였으며,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 따르면, 흉노도 조선과 같이 5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데, 천제를 형상한 동인(동인)을 휴도(休屠)라 불렀으니 곧 ‘수두’의 번역이요, 휴도 제사를 맡은 사람을 휴도왕(休屠王)이라 하여 또한 단군(檀君))이라는 뜻과 비슷하며, 휴도에 삼룡(三龍)을 모시니 용은 또한 신을 가리킨 것이다. 삼룡은 곧 삼신이니, 흉노족 또한 ‘수두교’를 수입하였음이 틀림없다.

고대에는 종교와 정치가 구별이 없어 종교 제사장(祭司長)이 곧 정치 원수(元首)이며, 종교가 전파되는 곳이 정치상 속지(屬地)이니, 대단군 이래 조선의 교화가 중국・흉노 등 각 민족에게 널리 퍼지면서 정시창 강역(疆域)이 확대되었음을 알수 있다.



발췌: 신채호/박은식의 조선상고사/한국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