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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신채호 조선상고사] 신라건국

 

130-134

3. 신라건국

  여태까지 학자들이 모두 “신라사가 고구려와 백제 두 사보다 비교적 완전하다”고 하였으나, 이는 아주 모르는 말이다. 고구려사와 백제사는 삭감이 많거니와, 신라사는 잘못된 것이 많아서 사료로 근거 삼을것이 매우 적으니, 이제 신라 건국사를 말하면서 이를 대강 논술하려 한다.

  신라 제도는 6부(部) 3성(姓)으로 지직되었는데, 신라본기에 따르면, 6부는 처음에 알천양산(閼川楊山)・돌산고허(突山高墟)・무산대수(茂山大樹)・자산진지(觜山珍支)・금산가리(金山加利)・명활산고야(明活山高耶) 여섯 마을이었는데, 신라 건국 제3세 유리왕(儒理王) 9년(기원32년) 여섯 마을 이름을 고치고 성을 주었다. 알천양산은 급량부(及梁部)라 하고 성을 (李)로 하였으며, 돌산고허는 사량부(沙梁部)라 하고 성을 최(崔) 하였으며, 무산대수는 점량부(漸梁部:1名 모양부(牟梁部))라 하고 성을 손(孫)으로 하였으며, 자산진지는 본피부(本彼部)라 하고 성을 정(鄭)으로 하였으며, 금산가리는 한기부(漢岐部)라 하고 성을 배(裵)로 하였으며, 명활산고야는 습비부(習比部)라 하고 성을 설(薛)로 하였다고 한다.

  3성은 박(朴)・석(昔)・김(金) 세 집이니, 처음에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 곁에 말이 끓어앉아 우는 것을 바라보고, 쫒아가 보니 말은 간 곳이 없고 큰 알 하나가 있으므로, 이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기르고 성을 박(朴)이라고 하였은데, 그가 나온 큰 알이 박만 하므로 ‘박’의 음을 딴 것이라고 한다.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하였는데, 혁거세는 그 읽는 법과 뜻이 다 전하지 않는다. 나이 13살에 영득하고 성숙하므로 인민이 그를 높여 거서간(居西干) 삼았다. 거서간은 그때 말로 귀인의 칭로하고 한다. 이것이 신라 건국 원년(기원 57년)이고, 이이가 박씨 시조이다.

  신라 동쪽에 왜국(倭國)이 있고, 왜국 동북쪽 1천리에 다파나국(多婆那國)이 있는데, 그 국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이를 밴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알을 내다 버리라고 하니, 여자가 차마 그럴수 없어서 비단으로 싸고 금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 금웨가 금관국(金官國) 바닷가에 이르니, 금관국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겨 가지지 않았는데, 진한(辰韓)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니 바닷가의 한 노파가 이를 건져 냈다. 열고 보니 그 속에 이린아이가 있어 노파가 데려다가 길렀다. 이때가 박혁거세 39년(기원전 19년) 이었는데, 금궤어서 빠져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고, 금괘가 와 닿을 때에 까치(鵲(작))가 따라오면서 울었으므로 작(鵲)자의 변을 따서 성을 석(昔)이라 하니, 석씨 시조이다.

  석탈해(昔脫解) 9년(기원65년) 금성(金城:신라수도 곧 경주(慶州))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므로 대보(大輔) 호공(瓠公)을 보내어 가 보게 하였더니, 금빛 조그만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고 있으므로, 그 금궤를 가져다가 열어보니 또한 조그만 어린아이가 있었다.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기르면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어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니, 이는 김씨 시조다.

  궤에서 나왔다, 알에서 깨어났다 하는 신화는 그때 사람이 그 시조 출생을 신비롭게 장식한 것이지만, 다만 6부 3성 사적이 고대사 원본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보태고 줄임이 많은 것은 애석한 일이다. 이를테면 조선 고사의 모든 인명과 지명이 처음엔 우리말로 짓고 이두자로 썼는데, 나중에 한문화(漢文化)가 성행하면서 한자로 고쳐 만들었으니, 원래는 ‘메주골’이라 하고 ‘미추홀(彌鄒忽)’ 또는 ‘매초홀(買肖忽)이라 쓰던 것을 나중엔 인천(仁川)이라 고친 것 따위이다. 이제 알천(閼川)・양산(楊山)・돌산고허(突山高墟) 등 한자로 지은 여섯 마을 이름이 6부 본이름이고, 급량부(及梁部)・사량부(沙梁部)・・・ 등 이두자로 지은 6부 이름이 여섯 마을의 나중 이름이라 함이 어찌 앞뒤 순서를 뒤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음이 그 하나이다.

  신라가 불경을 수입하기 전에는 모든 명사를 다만 이두자 음이나 뜻을 맞추어 쓸 뿐이었는데, 불교가 성행한 뒤에 몇몇 괴벽한 중들이 비숫하기만 하면 불경 숙어에 맞추어 다른 이두자로 고쳐 만들었다. 례를 들면, 소지왕(炤智王)을 달리 비처왕(毗處王)이라 일컫는데, 소지나 비처가 다 ’비치‘로 읽은 것이지만, 비처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소지는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요, 유리왕(儒理王)을 달리 세리지왕(世利智王)이라 일컫는데, 유리나 세리가 다 ’누리‘로 읽은 것이지만, 유리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세리는 또한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이다. 탈해왕(脫解王) 그 주에 일명 ’토해(吐解)라 하였는데, 탈해나 토해는 다 ‘타해’ 또는 ‘토해’로 읽은 것이고, 그 뜻은 무엇인지 알수 없으나 그 즈음 속어로 된 명사임을 분명하니, 토해(吐解)는 본래 쓴 이두자이고 탈해는 고쳐 만든 이두자로서, 불경에 해탈(解脫)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토해(吐解)의 뜻을 탈(脫)로 고쳐 만든 것이다. 원래는 그때 숙어의 음을 취한것이고, 탈출(脫出) 또는 해출(解出)의 뜻이 없으니, 금궤에서 탈출하였으므로 탈해라 하였다고 하는 것이 괴벽한 중들이 억지로 갖다 붙이 것임을 단언할수 있음이 그 둘이다.

  3성 시조가 다 큰 알에서 나왔으니 그 큰 알은 다 ‘박’만 할 것인데, 어찌하여 3성 시조가 다 같은 박씨가 되지 않고, 밖씨 시조 이외에 두 시조는 석씨와 김씨가 되었는가? 석・김 두 성이 다 금궤어서 나왔는데 어찌 같은 김씨가 되지 않고 하나는 석씨, 하나는 김씨가 되었는가? 석탈해(昔脫解)의 금궤에 까지가 따라와 울었으므로 작(鵲)자 변을 따서 석씨(昔氏)가 되었으면, 김알지(金閼智)가 올 때에 닭이 따라와 울었으니 계(鷄)자 변을 따서 해씨(奚氏)가 되어야 옳은데, 어찌 두 사람에게 다른 예를 써서 앞에서는 김씨가 되지 않고 석씨가 되었으며, 뒤에서는 해씨가 되지 않고 김씨가 되었는가? 신화라도 이같이 뒤섞여 조리가 없을뿐더러, 게다가 한자 파자장(破字匠)의 꾀가 섞여서 이두문 시대 실례와 많이 다르다는 점이 그 셋이다.

  처음 건국할 때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자리잡은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다. 그런데 ‘변한이 나라에 들어 항복하였다’느니, ‘동옥저가 아니라 ’북명인(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고 하는 따위는 더욱 황당한 말인 듯하다. 왜냐하면 북명(北溟)은 ‘북가시라’, 북동부여 별명으로 지금 만주 혼춘(琿春) 등지이고 고구려 대주류왕(大朱留王)의 시위장사(侍衛將士) 괴유(怪由)를 장사지낸곳이다. 그런데 이제 혼춘 농부가 밭 가운데서 예왕 도장을 얻어 수천리를 걸어 경주 한구석 조그만 나라인 신라왕에게 바쳤다 하는 것이 어찌 사실 같은 말이랴? 이는 경덕왕이 동부여 곧 북명(北溟)의 고적을 지금 강릉으로 옮긴 뒤에 조작한 황당한 말이니, 다른것도 거의 믿을 가치가 적음이 그 넷이다.

  신라가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문화가 가장 늦게 발달하여 역사 편찬이 겨우 그 건국 6백 년 뒤에야 비로소 겨우 북쪽 여러나라 신화를 모방하여 선대사(先代史)를 꾸몄는데, 그나마도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등의 병화(兵火)에 모두 타버리고, 고려 문사(文士)들이 남산과 북산의 검불을 주워다가 만든 것이므로, <신라 본기> 기록의 진위를 가려냄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역사나 마찬가지인데, 역사가들이 흔히 신라사가 비교적 와비된것인줄로 알라 그대로 믿었다.

  나의 연구에 따르면, 신라는 진한(辰韓) 6부를 통틀어 일컬음이 아니고, 6부 가운데 하나인 사량부(沙梁部)이다. 신라나 사량은 다 ‘새라’로 읽은 것이요, ‘새라’는 냇물 이름이니, ‘새라’의 위에 있으므로 ‘새라’라 일컬은 것이고, 사량은 사훼(沙喙:진흥왕 비문에 보임)라고도 기록했으며, 사훼는 ‘새불’이니 또한 ‘새라’우에 있는 ‘불’, 곧 들판이기 때문에 일컬은 이름이다.

  본기에 신라의 처음 이름을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으나, 서라벌은 ‘새라불’로 읽은 것이니, 또한 ‘새라’의 ‘불’이라는 뜻이다. 시조 혁거세는 곧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의 양자이고, 고허촌은 곧 사량부(沙梁部)이니, 소벌공의 ‘소벌(蘇伐)’은 또한 사훼(沙喙)와 같이 ‘새불’로도 읽을 것이므로 지명이고, 공(公)은 존칭이니 새불 자치회(自治會) 회장이므로 ‘새불공’이라 한 것이다. 말하자면 소벌공은 곧 고허촌장이라는 뜻인데, 마치 사람 이름같이 씀은 역사가가 잘못 쓴 것이다. 새라 부장(部長)의 양자인 박혁거세가 6부 전체의 왕(王) 되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새라’라 하고 이두자로 신라(新羅)・사로(斯盧)・사라(斯羅) 등으로 쓴 것이다.

  박씨뿐 아니라, 석씨・김씨도 다 사량부(沙梁部) 귀인의 성이니, 3성을 특별히 존중하는 것은 또한 삼신설(三神設)을 모방했기 때문이다. 본기 탈해왕 9년(기원65년) 비로소 김씨 시조인 아기 김알지(金閼智)를 주었다고 하였으나, 파사왕(婆娑王) 원년(기원80년) 왕후 사성부인(史省夫人) 김씨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 추존한 왕을 갈문왕이라 함)의 딸이라 하였으니, 그 나이를 따지면 허루(許漏)도 거의 알지의 아버지뻘 되는 김씨이니, 이로 미루어 보면 박・석・김 3성이 처음부터 사량부 안에 서로 혼인을 맺는 거족(巨族)이었는데, 함께 의논한 끝에 6부 전체를 가져 3성이 서로 임금 노릇하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이에 진한(辰韓) 자치제 제도가 변하여 세습하는 제왕의 나라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