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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경(山海經)」이란 어떤 책인가?

「산해경(山海經)」이란 어떤 책인가?

동양의 역사・지리・미속・종교 등을 총망라한 대표적인 기서(奇書)라고 일컬어지는 「산해경(山海經)」은 누가 지었는가?

요순(堯舜)시대의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고 구주(九州)를 분할할 때 백익(伯益)과 함께 만들었으며 그후 주(周)나라와 진(秦)나라에서 다시 기술했다고 전한다.

** 대요(大遼, 916년 ~ 1125년)는 거란족 중국 북부와 몽골 지역에 세운 왕조이다. 야율아보기가 세웠으며 몽골, 둥베이, 화베이의 일부를 차지하며 10~11세기경에 동아시아 최강국의 위세를 자랑했다. 916년 건국 당시에는 국호가 거란(契丹)이었는데, 947년에 대요로 바꾸고, 1125년 여진족의 공격을 받아 망했다. 보통 '요'라고 한다.

이 「산해경」이 전한(前漢)에서는 궁중의 비서(祕書)였는데 유흠(劉歆)에 의하여 다시 정리되었고 후한(後漢)때는 왕충(王充)과 조엽(照葉)이 그 뒤를 이어 주석을 하였으나 전하지 않았고 동진(東晉)의 곽박(郭璞)에 의하여 주석이 갖추어진 「산해경」이 이후어 졌다.

곽박 이후부터 산해경에 의한 문헌의 고증・방언・지리・민속・역사 등이 다시 제기되어 많은 연구와 다양한 주장들이 나왔고 「산해경」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아졌다.

 그 중에서도 청(靑)나라 학자인 필원(筆苑) 곽박(郭璞)이 주석 한 것에다 곽박 이후의 여러 학자들이 주석한 것을 뽑아 중보하여 「신교정산해경」을 펴냈다.


필원의 「신교정산해경」서문을 여기 소개한다.

「산해경」은 우(禹)와 익(益)이 만들었고 주진(周秦)시대에 기술하였다. 기 학문은 한(漢)나라에서 행하여졌고 진(晋)에서 밝혀졌으며 그것을 아는 자는 위(魏)나라 여도원(여道元)이었다.

오장산경(五藏山經) 34편은 실상은 우서(禹書)이다. 우(禹)와 백익(伯益)이 산천의 이름을 주관하고 그 제사의 차례를 정하고 그 이정표를 헤아리고 풀과 나무와 새와 짐승을 분별한 내용이 『서경』 하서우공편(夏書禹貢篇)과 『이아(爾雅)』 석지(釋地)편 및 『산해경』 남산경(南山經) 이하 34편에 나타나 있다.

『이아(爾雅)』에 이르기를 ‘세 번 이루어지면 곤륜산이 되고 높고 높은 곳이 경(京)이요, 두 번 이루어지면 영(英)이요, 뾰족하고 높은 것은 교(嶠)라 하고 작고 많은 것은 귀요, 따라붙은 것은 역이요, 홀로인 것은 촉(蜀)이요, 위가 바른 것은 장(章)이요, 산등성이는 강(岡)이요, 집과 같은 것은 밀(密)이요, 대산(大山)은 궁(宮)이요, 소산은 곽이요, 소산은 별(別)이요, 대산은 선(鮮)이요, 산이 끊어진 것은 형이요, 산의 동쪽은 조양(朝陽)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우(禹)가 이름 지은 것이다.

『산해경』에 나타난 곤륜산·경산·영산·고산·귀산·역고산·독산·장산·강산·밀산·곽산·선산·소경산·조양곡이 다 이것이다.  

『하서(夏書)』에는 ‘높은 산과 큰 강을 정하다’라 하고 공자가 자장(子張)에게 고하기를 ‘희생과 폐백을 만들라. 오악(五嶽)은 삼공(三公)과 견주고 소명산(小名山)은 자남(子男)과 견준다.’라고 한 것과 『산해경』에서 ‘모산(某山)에서 모산(某山)에 이르고 그 제사의 예절은 어떻게 하고 무엇을 묻으며 제사에 쓰이는 것은 무엇을 쓰는가’ 하는 예절과 『열자』가 ‘하혁(夏革)’을 인용하고 여불위(呂不韋)가 ‘이윤서(伊尹書)’를 인용한 것은 모두가 이 『산해경』에서 나온 것으로 이 두 저서는 다 선진(先秦)사람의 저작이요, 하혁과 이윤은 다 상(商)나라 사람이다. 그러므로 산해경의 34편은 우(禹)가 지었다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고 해외경(海外經) 4편과 해내경(海內經) 4편은 주진(周秦)에서 기술한 것이다.

우(禹)가 솥을 만들고 사물을 그려 넣을 때 백성으로 하여금 신령의 간사함을 알렸다. 그의 글을 보면 나라의 이름이 있고 산과 강이 있고 신령의 기괴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솥에 그려있는 것이었다. 이 솥이 진(秦)나라에서 없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앞에서 사람들이 그 그림을 설명하고 책자에 나타냈다. 유수(劉秀)가 또 해석하고 그 글을 더하였는데 이것이 대황경(大荒經) 이하 5편이다. 대황경 4편은 해외경을 해석하고 해내경(海內經) 1편은 해내경을 해석했다. 이때는 한(漢)나라에서 전해오는 것이었다. 또 산해경의 그림도 옛날과 달랐다. 유수가 그것에 의지하여 설명을 하였으며 곽박(郭璞)과 장준(張駿)도 이것을 보고 찬(讚)을 지었다. 유수(劉秀)의 표산해경(表山海經)에 이르기를 ‘길한 조짐과 변괴의 물을 고찰하고 먼 나라와 다른 사람들의 가요와 풍속을 볼 수 있다.’고 했으며 곽박의 『주산해경』 서문에는 ‘괴이하지 아니한 것이 괴이한 것은 괴이한 것이 없는 것이다. 괴이한 것이 괴이하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괴이한 것이 있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다.

유수와 곽박의 이 말은 족히 『산해경』의 의혹을 일소시켰으나 가히 『산해경』을 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산해경의 오장산경(五藏山經) 34편은 옛날의 토지의 도록으로 주례대사도(周禮大司徒) 구주(九州)의 지역과 동서남북의 수를 두루 알고 산과 수풀과 강과 연못과 구릉과 물가와 평지와 높고 건조한 땅과 낮고 습지인 땅을 분별하는데 쓰였다. 관자(管子)가 “무릇 병사의 주인된 자는 반드시 먼저 지도의 꾸불꾸불하고 험한 것과 수레가 넘치는 물과 이름난 산의 계곡의 통함과 물이 지나는 것과 험한 땅과 언덕의 있는 곳과 깔풀과 수풀의 나무와 갈대의 무성한 것과 길의 이정표의 멀고 가까운 것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다 『산해경』의 종류를 말한 것으로 그 서적이 대대로 전하여 없어지지 않았고 그 말의 괴상하고 괴상하지 아니한 것은 말단(末端)의 이야기이다.  

남산경에서 그 산을 고찰한 것은 작산·구여산·부옥산·회계 등의 산이며 땅은 한(漢)나라시대에는 오랑캐의 가운데가 된 것으로 그 다른 것은 글로써 전하지만 그 족적을 잃어버렸다.

서산경에서는 그 산에서 고찰할 것이 많은데 그 물은 하·위·한·낙·경·부우·관·죽·단·초·양·약·이·욕·제차·단·생·남 등이 있는데 이 모두가 다 옹양(雍梁) 두 주(州)의 물이며 경전에 나타나 있다. 그 내가 흘러 물 따라 흐르는데 지금도 확실히 믿을 수 있다.

북산경에서는 그 산이 모두 변방 밖에 있다. 옛날의 황복인데 경전에서는 또한 그 자취를 잃고 유택 및 황하의 근원을 믿을 수 있다.

북차삼경 이하는 그 산이 또한 고찰할 것이 많이 있다. 그 물에는 분·산·진·승·광·수·안문·연·교·평·심·영후·기·황·항·부·구·청장·탁장·동·우수·저·괴·팽·호타·자·구 등이 다 기주(冀州)에서 나오는 물로 경전에 나타나 있다. 그 개울은 흘러 물 따라 내려가며 지금도 확실히 믿을 수 있다.

동산경은 그 산의 물이 많아 가히 고찰할 수 없다. 태산·공상산·낙수·환수가 있는데 이곳은 청주(靑州)의 땅이다.

중산경은 부산에서 일어났으며 우(禹)가 도읍한 곳으로 그 산과 물의 명칭이 더욱 나타나 있다. 물에는 거저·노·휼·소·이·직어·선·양·간·단저·진·정회·양용용·감·괵·부호·형락의 낙·원호·호·양여·유·용려·황산·교촉·투수·곡·사·소·담·파·혜·간·호·공·염염·탁·초·재·호·문·자고·명·광·내수·합·휴·사·기난·태·역·매가 있는데 이것은 다 예주(豫州)의 물이다.

중차팔경은 경산(景山)에서 일어나 저·장·궤가 있다.

중차구경은 면락의 낙수가 있으며 민강·남강·북강·단·육·무·청냉연·견·여·살·예·윤·예원상구강이 있는데 이것은 다 형주(荊州)의 물이며 경전에 나타나 있으며 그 시내의 물이 흘러 물 따라 흐른다. 또 지금도 확실한 것을 믿을 수 있다.

곽박의 세상에는 전하는 지리서(地理書)가 다 먼 곳에서 인용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주석한 산과 물을 보면 이정표를 살피지 않고도 그 이름은 같고 실상이 다른 것이 있다. ‘지금의 모지(某地)에 모산(某山)이 있다’고 했는데 옳고 그른 것을 알지 못하겠다.

또 중산경에는 우수산과 노수와 휼수의 두 물이 있는데 지금의 산 서쪽 부산현의 지경에 있다고 했는데 망령되게 장안(長安)의 우수산 및 노수와 휼수의 두 물을 인용하였다. 곽산은 우수산에 가깝고 평양에 있는데 망령되게 잠수와 나강과 공현산을 인용하였다. 그의 잘못된 것이 이와 같다.

여도원이 지은 수경(水經) 주석에는 경전에서 기술한 것과 나라의 옛날 명칭과 이 산해경의 산천의 이름을 고증하여 그 길의 수를 참고하여 10가지 중에서 6가지를 얻고 처음으로 『산해경』에서 말하는 동서의 이정표를 알아 믿고 밝힘이 있어 비록 지금과 옛날의 세상에서 다르더라도 크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뒤에 지리를 찬술할 자는 많이 따랐다.

나(沅)는 이로써 그 공로가 곽박의 백 배나 된다고 이른다. 그러나 여도원의 저작은 겨우 물길이 지나는 것이요, 기타의 산과 물의 실마리를 일컬은 것이요, 족히 경전을 고증한 것으로 또한 틈이 있을 뿐이다.

서산경에 여장산이 있다고 한 것은 설종(薛綜)이 이르기를 ‘화음의 서쪽 6백리에 있다’고 했는데 지금 산에는 가히 고찰할 수 없고 이정표만 경에 합치된다.

서차삼경에 이르기를 이수가 낙수로 흘러든다고 했고 『수서(隋書)』 지리지에 이르기를 낙원현에 이수가 있다고 했는데 반드시 그 강일 것이다.

북차삼경에 이르기를 저수가 팽수로 흘러든다고 했고 『수서(隋書)』 지리지에 이르기를 방자(房子)에 팽수가 있다고 했다. 또한 그 강일 것이다.

또 『태평환우기(太平1宇記)』에 이르기를 보안군(保安軍)에 흘막천(吃莫川)이 있어 낙수로 흘러들며 그 물은 배나 떼를 이기지 못한다고 했는데 지금의 협서정변현(陝西靖邊縣)에 있다고 했다.

서차삼경을 안찰하면 약수가 있는데 낙(洛)으로 흘러들며 그 흐르는 것이 위와 같다. 또 약수라고 이름 한 것이 배나 떼를 이기지 못한다는 설과 합치하며 반드시 그 강일 것이다.

해내경(海內經)의 능문산은 당연히 용문산으로 지금의 협서한성(陝西韓城)이 이것이다. 양우산은 마땅히 진(秦)의 양우산으로 지금의 협서동관이 이것이며 고금(古今)의 지리가(地理家)가 그 지경 밖을 의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한(漢)나라나 위(魏)나라 이래로 소리로 전하는 것은 알지 못하여 이 같은 오류가 있었다.

무릇 이의 모든 줄기가 다 곽박이 자세하게 하지 못한 것이요, 여도원이 선택하지 못한 것이므로 내(沅)가 『산해경』의 주석에 공로가 있는 것이다.

또 『산해경』은 괴이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해석하는 자가 괴이하게 여겼을 뿐이다. 『산해경』에서 말하는 올빼미와 인어(人魚)는 다 사람의 얼굴을 했다고 이른 것은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은 대략 사람의 형상과 같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경에 이르기를 앵무와 성성(狌狌)은 능히 말을 한다고 한 것은 또한 대략 사람말과 같다는 것이다. 후세에 이것을 도록하여 드디어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놓아 이 새와 물고기를 지금은 떳떳이 볼 수 있다.

또 숭오산에 짐승이 있는데 그 생김새가 긴꼬리원숭이와 같고 팔에 무늬가 있고 표범의 꼬리에 던지기를 잘하며 이름을 거보(擧父)라고 한다 했는데 곽박은 혹은 과보라고 하는데 『이아(爾雅)』를 고찰하면 확보가 있는데 잘 뒤돌아본다고 했다. 이것은 원류의 무리로 거과확(擧送)의 세 글자가 소리가 서로 가깝고 곽박 주석의 『산해경』과 『이아』가 그 하나인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일반적인 짐승인 것을 알지 못하여 의혹이 생긴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산해경』이 괴이한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산해경』에서 풀과 나무로 질병을 다스린다고 말한 것이 많이 있다. 이는 내경(內經)에서 시작한 것이며 원(沅)이 비록 통달하지 못하였으나 이것은 후인(後人)들이 미칠 바 아닌 것을 알 것이다.

해외해내경(海外海內經) 8편은 유수(劉秀)가 교정하고 주석한 말들이 많이 섞여 있어 곽박이 주석한 뜻을 자세히 구한다면 또한 밝혀질 것이다.

여도원의 수경(水經) 주석은 많은 부분이 지금의 주석과 그 문장을 연결하여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원(沅)이 민첩하지 못하고 공사에 얽매여 이 『산해경』을 교정하고 주석하는데 무릇 5년이란 교열을 거쳐 이루어졌으며 모든 경전(經典), 곧 『장자』와 『열자』와 『제자백가의 전』과 주석과 제반의 서적에서 인용한 바를 밝히지 않음이 없다. 그 빠짐이 있으면 옛날부터 없던 것으로 내 힘의 미칠 바가 아니다. 이미 곽박의 주석 18권에 의지하여 그 차례가 어지러워지지 아니하고 또 목록 1편을 고정(考定)하여 앞에 붙이고 신교정(新校正)한 자라고 하였으며 송(宋)나라의 임억(林億)의 차례를 모방하였으므로 감히 주석(注釋)이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후학의 만물박사가 나오기를 기대할 뿐이다.

이상의 필원의 서문에서 보면 오장산경 34편은 우익(禹益)이 지은 것이고 그 밖의 해외경 4편과 해내경 4편은 주진(周秦)시대에 기록한 것이요, 대황경 이하 5편은 한(漢)나라시대 유수(劉秀)가 하정(夏鼎)에 기록되어 있는 도록을 풀어서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산해경』은 5천여 년 전에 지어진 최고의 경전이라 할 수 있다.

또 이 경전은 중국의 한(漢)나라 이후부터 빛을 보게 되었으며 한나라 이후 무수한 학자들이 『산해경』을 시에도 인용하고 저서에도 인용하였다.

그 한 예로 『포박자』의 저자인 갈홍(葛洪)이 『산해경』을 계승하고 도교발전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도연명(陶淵明)의 독산해경(讀山海經) 13수를 비롯하여 중국의 시가(詩歌)나 소설(小說) 등 무수한 작품에 많이 이용되었다. 또 중국뿐 아니라 지금은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연구되고 있다. 오늘날 『산해경』이 문학·사학·신화학·지리학·민속학·인류학·종교학·생물학·광물학·자원학 등 제반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 ‘신산해경학’이라고 할 정도로 종합과학의 학문으로 쓰이고 있다.

이 번역은 청(淸)나라 필원(畢沅)의 『신교정산해경』을 원본으로 하였으며 도면은 모사(模寫)한 것이다.

[출처] 040. 산해경(山海經) - 최형주 해역